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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영 / 사진=DB |
◆ 1913년 '조선공론'이 주목한 안상호
지난 18일 일요신문 보도에 따르면 1913년 발행된 일본어 잡지 '조선공론'에는 '일선동화의 선구 조선인 남편·일본인 아내 평판기'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조선공론'은 일제강점기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을 주요 독자로 삼았던 일본어 종합 잡지다. 해당 기사는 경성에서 진료소를 운영하던 안상호를 직접 찾아가는 르포 형식으로 그의 외모와 말투, 생활 모습 등을 상세히 소개했다.
잡지는 안상호에 대해 "말씨에서부터 태도까지 일본 내지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평가했다. 도쿄 자혜의원 의학교에서 공부한 뒤 경성에서 의사로 활동한 이력도 소개하며 재능과 근면성을 높이 평가했다.
◆ 일본인 아내와 결혼…재산도 늘어
안상호의 결혼 생활 역시 일본 매체의 주요 관심사였다. '조선공론'에 따르면 안상호는 일본 체류 당시 의친왕 이강의 의사로 활동했고, 당시 의친왕을 시중들던 일본인 여성 가와구치 이소코를 만나게 됐다. 이후 의친왕의 승낙을 받아 1907년 이소코와 결혼했다.
매체는 두 사람의 결혼 과정을 연애담처럼 묘사하면서 안상호를 "본래 운이 좋은 남자" "복이 많은 남자"라고 표현했다.
안상호는 의사로서의 성공과 함께 경제적으로도 상당한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기록됐다. '조선공론'은 그의 진료소가 번창했다며 "2~3년 사이에 택지도 생겼고, 전답도 생겼다"고 전했다. 이후 1926년 '매일신보'에도 시흥군 일대 안상호 소유 산림 10만여 평을 일본인 관리인이 관리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 '동화' 사례 소개부터 친일 단체 활동 이력·'모범 조선인' 평가까지
안상호와 가족이 일본식 생활을 받아들인 모습은 한 차례의 기록에 그치지 않는다. 1913년 '조선공론'은 안상호가 자녀들을 "순일본 내지식으로 양육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5년 뒤인 1918년 '매일신보' 역시 안상호와 그의 가족을 '일선동체의 가정'으로 다뤘다.
당시 안상호는 자신을 "일본 사람과 똑같다"고 표현하며 조선 옷을 입지 않고 매운 음식도 먹지 않는다고 밝혔다. 또 조선인들과 교류가 많지 않다는 취지의 발언도 남겼다.
안상호의 행적 가운데 친일 성격의 단체 활동도 확인된다. 그는 1916년 조선인과 일본인의 친목과 융화를 내세운 대정친목회 평의원을 지냈다. 이 밖에도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 준비위원, 경성부 협의회원, 경성 종로금융조합장 등을 역임한 것으로 나타났다.
안상호는 1907년 일본 의학 전문지 '의해시보'에서도 '모범'이 될 조선인 의사로 평가받은 기록이 있다. 이후 1913년 '조선공론', 1918년 '매일신보'에서도 일본과 조선의 '동화' 또는 '융화'를 보여주는 사례로 거듭 소개됐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일본 측 매체들이 안상호 개인과 가족을 일본식 동화의 사례로 반복해 조명했다는 점에서 그의 친일 행적 논란도 커지는 모습이다. 하영은 안상호의 친일 행각이 파묘되자 자필 사과문을 게시하며 고개를 숙였다. 촬영 중인 SBS 드라마 '승산 있습니다' 현장에서도 눈물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민족문제연구소는 연좌제적 비난을 경계하기도 했다. 이들은 "안상호가 대정친목회 평의원(일종의 대의원 격)으로 참여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친일 행위"라고 짚으면서도 "논란의 본질은 후손이라는 이유 자체보다 공적 영역에서 최소한의 역사적 성찰 없이 조상의 이력을 미화하고 소비한 태도에 있다. 식민지배 하에서 형성된 자산과 기득권의 세습 문제에 대한 성찰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안상호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끝없이 파묘되는 가운데, 논란 속 하영이 연예 활동을 무탈히 이어갈 수 있을지 시선이 쏠리고 있다.
[스포츠투데이 정예원 기자 ent@st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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